2018.11.18.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저는 해마다 추수감사절 때가 되면, 최영기 목사님이 2008년에 쓰신 목회칼럼이 생각납니다.
금년에도 다시 한 번 여러분과 함께 나눕니다. 아래 글에서 “저”는 최영기 목사님이십니다.
저는 쉬는 날인 목요일에는 DVD 영화를 우편으로 받아 봅니다. 액션 영화보다는 인생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를 선호합니다.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인간들은 자신의 행복을 얼마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리며 사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에 걸린 사람이 주인공인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중독 증세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인생의 목표는 오로지 한 가지, 중독 증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그런 중독 증세에 시달리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습니다.
법정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 누명에서 벗어나보려고 몸부림칩니다. 유리한 증인이 실종되어 안타까워도 하고, 변호사에게 배신을 당하여 괴로워도 하고,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아 절망하기도하고... 누명을 벗는 것이 영화 주인공의 인생 목표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억울한 누명에서 자유합니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습니다.
전쟁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고, 하룻밤 안전하게 잠잘 곳을 염려합니다. 언제 머리 위에서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두려움과, 언제 군인들이 방문을 부수고 들어 닥칠지 모르는 공포에 시달립니다. 이들의 간절한 소원은 밤에 다리 뻗고 편히 잠자고, 가족들이 오순도순 식탁 주위에 둘러앉아 밥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이런 환경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습니다.
신체장애자를 주제로 한 영화에서 주인공은 신체장애를 극복하는 것이 삶의 목표입니다. 보고, 말하고, 듣고, 걷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아무런 신체장애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습니다.
암과 투병하는 분들은 암이란 판정을 받고 충격에 빠지고, 치료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절망하고, 치료가 끝난 후에는 재발의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이런 사람들이 엄청난 재산을 쏟아 붓는 목표는 암 세포가 사라진 깨끗한 몸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이러한 몸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재 누리는 만큼만 누릴 수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수두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좋은 여건 속에서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작은 불편에도 실망하고, 원망하고, 절망합니다. 축복 가운데에서 불평하며 산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