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모든 선택은 어렵다. 내 몸에 맞는 옷 하나를 고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맛있는 과일을 선택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교회를 선택하는 일은 더더욱 그렇다. 교회 선택은 물건을 고를 때처럼 이것저것 물어 가며 살필 수도 없다. 일단 선택하고 나면 반품하기도 쉽지 않다. 또 교회는 눈에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목회자도 중요하지만, 교회 구성원도 중요하다. 그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적 분별력, 본질을 들여다보는 깊이, 그리고 여러 가지 요소들을 함께 볼 수 있는 폭넓은 눈과 균형 감각이 있어야 한다. 사실이다.

바둑의 고수인 이창호의 바둑을 읽어 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교회의 영적 현실을 읽어 낸다는 것은 정말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교회의 영적 현실이 혼탁해서만은 아니다. 신앙의 세계라는 게 본래 무지·망상 ·심리적인 투사가 작동하기 쉬운 곳이기 때문이고, 포장은 눈에 잘 띄지만, 내용은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우리가 얼마나 교회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지를 매우 역설적으로 말했다.

"교회는 교회이기를 중지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도 교회는 생명을 이어 갈 수 있고, 힘과 광채와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처럼 보이는 것도, 혹은 엉터리 교회도, 혹은 졸고 있고 곁눈질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교회도,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이 일어나지 않는 제도, 교리, 프로그램, 문제만이 난무하는 교회도 이 시대에는 특별한 인기를 얻을 수 있고, 사회와 국가로부터 매우 특별한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실이다. 깊이의 차원에서 보면 교회이기를 중지한 교회, 문제만이 난무하는 교회가 사람들의 평가와 존경을 받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하여, 부족하지만 건강한 교회를 선택하는 최소한의 기준을 아주 간략하게 말해 보려 한다.

 

교회 선택의 주요 포인트

첫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에 가까운지 종교적인 조직에 가까운지를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일 중심 교회인지 관계 중심 교회인지를 보아야 한다. 물론 몸이냐 조직이냐 하는 것을 판단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하지만 판단할 수 있는 맥락이 없지는 않다. 목회자가 그리스도인의 일상과 인격적인 소통을 중시하는지, 비전과 꿈을 내세우며 전도와 선교 등의 사역과 업적을 중시하는지를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각종 프로그램이나 일이 많은 교회, 성장에 관심이 많은 교회는 조직일 가능성이 많다. 성장에 관심이 많으면 교회가 사역 중심으로 돌아가고, 사역 중심인 목회자는 성공 욕망에 붙잡혀 있을 가능성이 많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의 성숙과 제자도를 중시하는 교회, 일상의 삶을 강조하는 교회, 섬김과 나눔을 강조하는 교회는 몸일 가능성이 많다. 목회자와 성도들에게서도 여유와 따뜻한 배려가 묻어날 가능성이 많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듣는 교회인지를 보아야 한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이기 위해서는(딤전 3:15) 말하는 것보다 듣는 일에 우선이어야 하고, 말씀의 종노릇을 해야 한다. 그런데 말씀의 종노릇 해야 하는 교회가 반대로 말씀을 종으로 부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듣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는 자들은 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듣고 말하는 교회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많은 설교자가 선포자일 뿐 경청자는 아니라는 것을. 많은 목회자가 사람들이 좇는 성공에 발맞춰 번영 신학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설교가 하나님나라를 지향하기보다는 세상에서의 평안과 부귀영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강단은 깊이가 없는 천박함, 겉만 번지르르한 피상성, 삶과 구원의 신비와 풍성함을 담아내지 못하는 빈곤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셋째,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으로 운영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교회는 자발성에 의해 작동되는 매우 독특한 곳이다. 힘의 지배와 일방통행이 자리 잡아서는 안 되는 지체 공동체이다. 그 때문에 몇 사람이 교회 운영을 좌우해서는 안 된다. 공급자와 소비자가 따로 있어서도 안 된다. 단지 민주적인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민주적인 과정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함께 굴복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고, 서로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는 서로서로 삶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서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누구도 그리스도의 자리를 꿰차면 안 된다. 특정한 몇 사람이 권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이미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다.

넷째, 교회 재정의 투명성을 보아야 한다. 헌금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지출하는지를 보면 목회자의 가치관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이라며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 하나를 생각해 보려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당신의 백성 삼으시고 교회 되게 하신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세상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일까?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악한 세상을 짓밟고 승리하게 하기 위해서일까? 흔히 말하는 성공, 즉 머리가 되게 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 교회 되게 하신 것은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삶, 죽음과 죄로부터 해방된 삶, 우상의 헛됨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다. 교회(당신의 백성)를 통해 세상의 현실과는 다른 현실, 즉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보여 주기 위해서다. 그 때문에 우리가 교회를 볼 때에 종교적 차원, 영적인 차원,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면 안 된다.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주님의 몸이라는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그래야 교회를 제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교회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교회 생태계를 살리는 건강한 교회 선택을 할 수 있다.

작은 교회에 대한 오해

마지막으로 한 가지 오해는 짚어야겠다. 우리는 보통 큰 교회는 재정적인 부담, 봉사에 대한 부담이 적은 데 비해 작은 교회는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정반대다. 규모가 클수록 비본질적인 일들이 많아지고, 조직과 시설을 관리해야 하는 비용이 많이 들어가고, 많은 일을 해서 이름을 내고 싶은 욕심이 커지기 때문에 재정과 봉사의 부담이 더 늘어난다. 내가 목격한 바로는 그렇다. 물론 작은 교회도 목회자에 따라 차이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작은 교회가 큰 교회보다 재정적인 부담, 봉사의 부담이 적은 건 사실이다. 또 규모가 작다고 해서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작은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삶을 배우고 경험하기에 유익한 것도 사실이다. 사회적인 눈으로 보면 작은 교회가 약점이 많지만, 하나님나라의 눈으로 보면 강점이 많다. 물론 작은 교회가 좋다고 강변하는 건 아니다. 사실이 그러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교회의 양극화, 교회 생태계 위기의 현실을 아파하며 여러 이야기를 했다. 몸은 가장 연약한 지체에 의해 영향을 받는데, 교회는 연약한 지체를 외면한 채 지그시 짓밟고 있는 현실을 이야기했다. 사실 이 현실은 너무나도 부끄러운 교회의 수치이며 가장 교회답지 못한 일탈이다. 교회는 속히 이 수치와 일탈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본질로 돌아와야 한다. 그런데 그 길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뜻밖에 가까이에 있다. 필자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지혜롭고도 전략적인 교회 선택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의 교회 선택이 교회 생태계를 살리는 첩경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인의 책임

누군가는 필자의 이런 생각을 매우 의아스럽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교회의 미래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고 해야지 그리스도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인간 중심적 사고라고 비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지금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주권에 달려 있다며 나 몰라라 하는 교회의 행태를 더는 신앙의 이름으로 용인해서는 안 되겠기에 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교회 선택권이 얼마나 막중한 책임이 뒤따르는 일인지를 깊이 인식하고, 전략적이면서도 책임 있게 교회 선택권을 사용해야 하겠기에 하는 말이다. 사실 그동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교회 선택권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지 않은가? 그저 소박하게 개인적인 영적 복지와 몇몇 눈에 띄는 유익을 위해 교회 선택을 해 왔지 않은가? 또 포장만 그럴듯한 교회들을 선택하는 실수도 적잖이 했지 않은가? 그 결과 세상으로부터 돌팔매를 맞을 수밖에 없는 교회답지 않은 교회들이 독버섯처럼 자라기도 했고, 몇몇 교회는 공룡처럼 거대화되는 돌연변이가 돌출하기도 했지 않은가?

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듯한 제안을 하는 것이다. 이제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단지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로, 교회 건물이 훌륭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이유로, 프로그램이 다양하다는 이유로 교회 선택권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이제는 나의 선택이 교회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엄연한 진실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나라라는 더 큰 가치를 위해 교회 선택권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나님 앞에서 역사의식과 책임 의식을 갖고 전략적으로 교회 선택권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공존해야 하니까 말이다.

정병선 / 말씀샘교회 목사, <어느 목회자의 고백>, <마가를 통해 본 예수와 한국교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