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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돌아봐야 할 쓴소리 (퍼온 글)

김동수 0 597

저희교회는 모범적인 교회라고 생각되지만,

 

선줄로 생각하는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조심스레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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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版 바리새인이 되려는가?

 

한국교회는 ‘善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노상강도(路上强盜)를 만나 죽게 된 불쌍한 사람을 누가 거두었습니까? 제사장(祭司長)이었나요? 레위 사람이었나요? 그들은 모두 보고도 못 본체 지나갔지만 홀대받던 사마리아인만은 데려다가 정성껏 치료해주었습니다. 여기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누구입니까? 성경대로 사는 정통파 유대교 지도자들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목사요, 장로요, 신실한 집사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껍데기 믿음보다는 믿음의 알맹이에 충실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는 예수님의 황금률(黃金律)을 교회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상숭배(偶像崇拜)하지 말라는 모세의 율법만 알고 정작 그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은 잊은 듯합니다.

 

한국교회에는 평화, 용서, 사랑, 나눔, 섬김, 평등 등 기독교의 진리 구현에 충실해야 합니다. 물론 이를 위해 애쓰는 교회가 많습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에서 그런 것들보다 더 우선시하는 가치가 있으니, 바로 전도입니다. 한국교회는 전도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로 믿음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몇 명이나 전도했느냐가 믿음의 척도가 됩니다. 섬김과 나눔을 기리는 상은 없어도 전도 잘했다고 주는 상은 어느 교회나 있습니다. 교회의 지상목표는 부흥입니다. 고대광실(高臺廣室) 교회를 건축하고는 빈자리를 채워달라고 지극정성으로 기도합니다. 교회의 역량은 전도에 집중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옳습니다. 진리를 구현하지 않는 교회는 결국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맙니다. 부흥 지상주의에 빠진 한국교회는 이제 부흥을 멈추었습니다. 교회로 오는 발걸음보다 교회를 떠나는 발걸음이 많습니다. 어찌하렵니까?

 

유럽의 열강들은 신대륙을 정복하면서 무고한 원주민들을 수도 없이 죽였습니다. 대부분의 종족이 멸절되었습니다. 정복자들 옆에는 선교사가 있었고, 정복지에는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경(地境)이 확대되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유럽교회는 갈수록 쇠퇴하고 있습니다. 고색창연한 교회에 교인은 없고 관광객들만 가득합니다. 한국교회는 피로 얼룩진 유럽교회의 宣敎 歷史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돌기둥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구약 레위기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봉은사에 간 청년들은 이 말씀을 신봉하여 우상이 파괴되길 기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우상이란 하나님의 전능함을 신뢰하지 못하는 자들이 그분 대신에 섬기는 그 무엇을 말합니다. 우상숭배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부처님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미물(微物)에 기대어 인생을 헛되이 보낸다면 노하실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이셨지만 아주 싫어한 부류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이라는 형식주의에 빠져 정작 그 율법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죽하시면 그들을 보고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했을까요. 한국교회가 아직도 성경을 바리새인처럼 읽는다면 큰일입니다.

 

청년들이 신봉한 레위기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라.” 레위기에는 이런 식의 율법이 잔뜩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말씀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돼지고기는 안 먹습니까?

 

그들은 눈 먼 사람이면서 눈 먼 사람을 인도하는 길잡이들이다. 눈 먼 사람이 눈 먼 사람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율법주의 바리새인들을 두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봉은사에 간 청년들과 그들의 지도자에게 하시는 말씀이자, 율법주의에 눈이 어두워가는 한국교회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상과 벗하는 한국교회

 

예수님은 한 번도 우상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복음서 그 어디에도 우상이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당시는 아무도 우상숭배를 안 했으니까. 아닙니다. 당시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팔레스타인은 물론이고 아시아, 그리스, 로마 곳곳에는 神堂과 神像이 즐비했습니다.

 

예수님은 돌이나 나무로 만든 신상보다 더 가증스러운 것이 우리에게 가득 차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재물, 곧 맘몬(Mammon)입니다. 그래서 맘몬을 숭배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財物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이런 말씀도 하셨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숭배하지 말아야 할 우상은 재물입니다.

 

한국교회는 만성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 병의 증상은 많이 모으고, 크게 짓고, 많이 거두는 것입니다. 열심히 전도합니다. 교회당을 번듯하게 짓습니다. 십일조를 강요합니다. 교회성장 세미나는 여기저기서 수도 없이 개최되고, 그곳에 가면 으레 급성장한 교회의 목사들이 성공사례를 자랑스레 늘어놓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 특히 강조되는 것이 전도입니다. 일단 교인이 늘어야 헌금도 늘고, 헌금이 늘어야 교회 증축도 가능하기 때문이죠. 전도는 軍事作戰처럼 전개되기도 하고, 다단계판매방식을 차용하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 선물은 필수적입니다. 한국교회는 이 병을 치료해야 합니다. 이미 만성이 된 이 병으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부여받은 사명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전도, 전도 하건만 한국교회는 이미 10여 년 전에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교회 수는 증가하나 교인은 감소하는 기현상이 여러 해 지속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탐심(貪心)이 곧 우상숭배라고 하십니다. 한국교회는 성장주의라는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교인 수가 교회의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도를 신앙의 척도로 삼는 교회, 십일조 잘 내면 부자 된다는 식의 설교를 하는 교회는 이미 물신주의(物神主義)에 빠진 교회입니다. 우상과 벗하는 교회입니다.

 

네게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듣고 있던 자가 근심에 빠졌습니다. 그가 큰 부자였거든요. 교회는 청빈(淸貧)해야 합니다. 그리고 청빈을 가르쳐야 합니다.

 

전도의 본질은 사랑이다

 

일부 교회의 전도방식은 특이합니다. 그들은 마치 축귀(逐鬼)하듯이 전도하고, 전쟁하듯이 전도합니다. 먼저 전도의 목표를 정합니다. 목표는 지역일수도 있고, 사람일수도 있고, 기관일수도 있겠죠. 정해진 전도대상은 현재 마귀의 지배하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그 대상을 악의 사슬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전도란 곧 악의 세력과의 한판 전쟁입니다.

 

그들은 이런 전도방식의 근거를 구약성경 여호수아에서 찾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山地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Anakim)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다.” 부흥을 원하는 교회가 단골로 내거는 구호가 ‘이 山地를 내게 주소서’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전도가 아니라 역경을 딛고 하늘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이 곳곳에서 부닥치게 되는 훼방꾼들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물리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천로역정(天路歷程)의 인생길에서 우리는 숱한 난관을 만납니다. 그 난관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우리는 뚫고 지나가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즉, 산지란 우리 기독교인들이 극복해야할 난관을 말합니다.

 

이런 전도방식은 평화를 깰 우려가 있습니다. ‘그들을 쫓아내리다.’ 식의 전도는 적과 동지를 가르게 됩니다. 우리만 옳고, 우리만 구원 받는다는 선민사상(選民思想)을 부각시켜 오히려 전도를 방해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전도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좀 길지만 그분의 전도방식을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 예수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으로 앓는 모든 환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과 간질병 환자들과 중풍병 환자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으로부터,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다.

 

예수님의 전도방식은 고침입니다. 낮고 누추한 곳으로 내려가셔서 돈 없고, 힘없는 백성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장애를 치유하시고, 토색(討索)하고 간음(姦淫)한 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전도의 본질은 결국 사랑입니다. 전도하고 싶습니까? 눈물이 있는 곳으로, 고통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눈물을 닦아드리고, 고통을 함께 나누십시오.

 

감히 부탁드립니다. 한국교회여, 전도하지 마십시오. 사랑하십시오. 한국교회에는 이미 일천만 성도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면 족합니다. 전도보다는 허물어진 교회의 담장을 보수(補修)해야 할 때입니다. 바리새파를 척결해야 할 때입니다. 배금주의를 혁파해야 할 때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전도의 비결을 알려주시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불신지옥을 외칠 것이 아니라 착한 행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한다면 전도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사랑에 치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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