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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란 말에 대해서 바로알기!

박세근 0 869
성경에 나와있는 예화중에 착하고
부지런한 종과 그러지 못한 종의 이야기가 있다.
 
다들 아는 이야기인데...
 
100원을 줬는데 200원을 남겨 온 종은 칭찬받고
100원을 줬는데 100원 그데로 가지고 온 종은
호되게 혼나고 그 있는 것까지 빼앗겼다.
 
성경은 자본주의를 정당화 하고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값을 지불해야만 생존하도록
하나님께서 사망의 저주를 이미 내리셨기 때문이다.
 
부자라고 마냥 저주하시고
가난한 자라고하여 마냥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린 보통 부의 차이를 서로 비교하여
열등을 갖고 소위 말하는 상처를 받았다고
변명들을 늘여놓는다.
 
"나도 저들과 같은 환경이였다면 지금 왕자, 공주처럼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나의 팔자때문에...
이모양 이꼴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상처의 원인이라고 사람들은 굳게 믿고있다.
 
세상 사람들이 주장하는 이러한 상처는 말 그데로 상처이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이런 상처들로부터 벗어나게 할만한
방법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불쌍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사람들이 쉽게 사용하는 상처라는
말을 사용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상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미
해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원래 상처라는 것은 두고두고 아픈 것인데...
세상사람들은 죽으면 죽음 이후에 있을 형벌의 댓가를
영원히 받기 때문에 생전의 일을 죽어서도 안고가는
상처속에 놓여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생전의 상처가 죽으면 없어지기 때문에...
어쩌면 다음 세상에 가서 전혀 기억을 못할지도...
 
그러나, 그것이 세상사람들 처럼 동일하게 느끼다 보니
스스로가 상처받았다고 고집을 부릴 따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상처의 모양은 시련이란 단어로
바꾸어서 인식해야 한다.
 
어려움, 하드트레이닝 등의 단어로 바꾸어서 인식해야 하는것이다.
 
자꾸 상처라는 관점으로 의식하다 보면...
100원만 남기는 자로 스스로의 삶을 전락시키게 되어있다.
 
그러나, 시련과 하드트레이닝이라는 관점으로 의식하다 보면...
200원 이상을 남기는 쾌거를 경험할 수 있다.
 
만약에 100원조차 남기지 못하게 만드는 원래 그런 조건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가끔가다가 이런 사람들 조차도 200원을 남기는 삶을
사는 사례들을 속속 접하게 된다.(닉부이치치 같은...)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게 하시기 전에 내 스스로가 먼져
고쳐먹어야 할 태도는 상처라는 것에 대한 개념을
올바로 하는 일일 것이다.(건강한 자아상의 시작)
 
그리스도인은 상처라는 말을 함부로 썼다가는
망신 당하기 쉽기 때문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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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리 "삐졌다", "빈정상했다" 라는 표현이 좀 유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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