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목사 이경준목사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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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이면 상대방을 기분 좋게

다운교회 0 306
지난 주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여자 어린애 하나가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어린애가 옆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하면 좀 자제를 할까 하여, 제가 몇 마디 말을 건넸습니다. 웬만한 애 같으면 민망하여 투정을 멈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잠깐 멈칫하더니 좀더 심하게 투정을 부렸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 엄마가 “할아버지가 이놈 한다.” 하며 그 애를 위협(?)하였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엘리베이터 안을 둘러보았습니다. 다른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고, 제가 가장 나이가 많아 보였습니다. 결국 그 ‘할아버지’는 저였습니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났습니다. ‘나를 보고 할아버지라고 하다니.’ 하기는 제가 26살에 장가를 가서 바로 아들을 낳고, 다시 우리 아들이 26살에 장가를 가서 바로 애를 낳았으면 저는 할아버지가 되었을 나이입니다. 저는 두 형님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형님들이 낳은 제 조카가 일곱 명에, 저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애들이 이미 열 명이 넘었습니다. 그래도 저의 애들이 아직 장가를 가기 전에 남들에게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것이 별로 기분이 좋진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한 번 더 있었습니다. 어린이대공원으로 제 아내와 산책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애가 아버지와 공받기 놀이를 하고 있는데 매우 서툴렀습니다. 그런데 아이도 아이거니와 그 아버지가 공을 던져주는 솜씨도 서툴렀습니다. 조금 있더니 그 아버지는 큰 애와 놀고 있고, 작은 아이는 혼자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제가 작은 아이와 놀아주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공을 맞추어 던져주니까 작은 아이도 제법 공을 받게 되어 신이 나게 되었습니다.

얼마간 놀아준 후에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데, 그 아버지가 아이에게 인사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인사란,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해야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날따라 제가 진 바지에 T 셔츠를 입고 있었고 운동화까지 신고 있었습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젊은 차림이었는데 ‘할아버지’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아, 내가 이제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나이가 되었구나.’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 아버지의 사회성 부족을 마음속으로 나무라면서 말이죠.

같은 값이면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할 수 있는 것도 사회성 개발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기혼인지 미혼인지 궁금할 경우, “미혼이시죠?” 하고 묻는 것입니다. 결혼을 한 사람이라면, “아니오, 벌써 몇 년 전에 결혼했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면서도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미혼이라면 자연스럽게 “네” 하고 대답을 하겠지요. 상대가 여자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미혼인 사람에게 “큰 애가 몇 살인가요?” 하고 묻는다면 평생 원수가 될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아기를 안고 있는데, 딸인지 아들인지 궁금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딸인가 봐요.” 했는데 아들이라고 대답을 한다면, “그런데 어쩜 이렇게 예뻐요.”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들인가 봐요.” 했는데 “아니에요, 딸이에요.” 한다면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위에 말씀드린 내용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가식’으로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마음에 없더라도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상대방에게도 해줄 수 있는 자세는 ‘의지적인 사랑’입니다. “할아버지가 이놈 한다.”라는 말 대신에, “아저씨가 이놈 하신다.” 라고 했으면 제 기분이 그렇게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빠한테 혼난다.”라고 한다면 오히려 곤란해지겠지요. “옷이 예쁘네요.”보다는 “정말 잘 어울리세요.”라든지 “옷 고르는 솜씨가 대단하세요.”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는 나라도 그랬겠어.”라고 동감한 후에 반대의견을 내놓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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