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한 벽수 씨, 목사에게 묻다』(두란도에서 나온 책)에서 인용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 사역이 지리멸렬의 길을 걷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특히 중고등부의 추락은 끝을 모를 정도다. 입시 전장에 내몰린 아이들은 신앙생활에 깊이 발을 담글 여유가 없다. 여유가 없다손 치더라도 아이들의 시선을 흐트러뜨리고 주의를 끌어가는 요인들이 허다하다.
“교회가 시간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는 학부모들이 많지만 그건 성령님이 역사하실 여지를 고려하지 않는 판단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지혜와 총명이 넘치고 모략의 신이 함께합니다. 자제력이 약했던 아이들이 스스로 질서를 세우고, 정신이 맑아져서, 능력이 살아나죠. 말씀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고 가치관과 삶의 목적이 분명지기만 하면 공부는 알아서 하게 됩니다. 등 떠밀려서 공부하는 친구들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결국 학부모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보다 아이의 면모를 잘 알고 계시며 자녀는 엄마아빠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심어두신 하나님의 선물을 찾아내고 살려가도록 도와줄 게 아니겠습니까?”
통념을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갈라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대학에 들어가는 게 성공의 지름길인지 돌아보라는 것이다. 올해 떨어지면 내년에 한 번 더 하면 되고, 꼭 들어가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지적한다. 아이들을 부모가 생각하는 반듯한 틀 안에 옭아매려는 마음가짐도 버리길 주문한다. 성실이니 정직이니 하는 큰 테두리를 그려주는 건 바람직하지만 시시콜콜 단속하고 규제하는 건 반발을 부를 따름이라는 것이다. 한창 호르몬에 휘둘리는 아이들과 일대일로 맞서 같이 펄펄 뛴다면 아빠엄마 역시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한 까닭이라고 꼬집는다.
“아휴, 목사님처럼 모범생 자제를 둔 분이 뭘 아시겠어요?”
“큰애는 사춘기를 요란하게 겪었어요. 사춘기 아이들이 할 만한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상당히 반항적이었고, 상당 기간 방황기를 겪었습니다.”
그러던 아이가 돌아왔다. 아이가 이처럼 전적으로 돌아오기까지 아빠엄마는 무얼 했을까? 무한정 기다렸을 뿐이라고 말한다.
“고등학교 다닐 때, 아이의 방에 들어가 보면 컴퓨터 게임을 하기 일쑤였어요.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말리면 더하고 싶은 게 사춘기 아이의 심리잖아요. ‘목 안 아프냐?’고 묻고 어깨와 등을 주물러 주었습니다. 배가 고프다면 라면을 끓여주었습니다. 숙주를 깔고, 계란을 풀고, 파를 올린 라면을 예쁜 그릇에 담아 물과 함께 정중하게 가져다줬어요. 생일이 되면 최고의 찬사를 담아 카드를 주었습니다. 별일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아이는 믿고 기다려주는 아빠라는 인정을 받았던 것 같아요. 카드를 버리지 않고 책상에 딱 세워 놓았더라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심하게 꾸짖으면 속은 후련할지 몰라도 소통이 단절된다. 일단 창구가 닫히면 아이는 엉뚱한 데서 삶의 정보를 얻고 정신적 영향을 받게 된다. 훨씬 더 위험한 상황에 몰리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소통의 줄을 지켜야,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