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목사 이경준목사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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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우 집사님을 떠나보내면서

다운교회 0 299
지난 주일 점심시간에 고춧가루를 팔던 집사님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저는 무슨 일이든지 망설이는 버릇이 있는데, 집사님은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무슨 요청을 하면, 언제나 “그러죠, 뭐.”가 대답이었습니다. 처음 사고 소식을 듣고 응급실로 뛰어갔을 때, 응급실에서 병원 사람들이 집사님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건성으로 하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짐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 사람들이 포기할 정도이구나.’ 하고 말이죠. 그래서 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병원에서 포기할 정도이면, 하나님, 지금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시간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예레미야 33:3)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편 50:15) “하나님께서 이런 약속을 주셨으니 이루어주셔야 합니다.” 하면서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집사님을 우리 곁에서 먼저 데려가셨습니다.

집사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을 섬기다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지난 주일 점심시간에도 우리를 섬겼던 모습을 여러분은 모두 기억할 것입니다. 집사님은 매일 아침 새벽기도 시간이면 일어나 주님과 교제를 가졌다고 합니다. 월요일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 말씀을 보고 기도한 후에 가족들을 섬기고 고객들을 섬겼다고 합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며칠 동안 가족들의 마음을 준비시킨 후에 금요일 오전 10시 10분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린 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생명을 다시 한번 돌려주세요. 의식을 다시 한번 찾게 도와주세요.” 이것이 여러분 모두의 기도제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바울의 말이 생각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립보서 1:21-24) 아마 집사님도 그 두 사이에 끼여 갈등을 하다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편을 택하셨나봅니다.

사실 트럭에 치어 몇 미터를 끌려갈 정도면 성하지 않은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닐 것입니다. 혈압도 오르지 않고, 체온도 불안하며, 진찰을 할 상태가 아니어서 그렇지, 온 몸이 아팠을 것입니다. 집사님은 더 이상 고통도 없고 이별도 없고 아픔이 없는 곳으로 우리보다 먼저 가셨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 야속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이 땅에 놓아둔 채 먼저 가시다니요. 우리는 주일이면 집사님의 모습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를 섬겨주시던 부엌에서.

오가면서 생각이 많았습니다. 아무리 길어도, 저도 30년 남짓 남았겠지요. 저도 스스로 젊은 줄 알았는데 살아온 날이 훨씬 많습니다. 가능한 대로 감사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기뻐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미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을 더 좋아하며 예수님을 더 닮아가고, 성령님께 더 순종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아침 10:10, 집사님을 떠나보내면서 저는 요한복음 10:10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대로, 집사님은 ‘생명(영생)을 얻었고 주님 안에서 풍성한 삶’을 마지막까지 누리다가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께 불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집사님의 가족과 모든 성도들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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