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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 사랑방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간증(서상대 형제)

이경준목사 3 1380

어린 시절 제 기억 속의 교회는 크리스마스 날 교회에서 주는 연필 공책 등의 선물을 받기 위해 눈보라와 싸늘한 칼바람을 무릅쓰며 교회로 향하던 가난하고 고단했던 기억속의 삽화들이 전부입니다. 1960년대의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라는 불명예의 멍에를 진 한국에서도 서울 남쪽의 끝자락 가난한 마을의 어린 소년인 저는 어느 해인가 크리스마스 날 아침 연례행사가 된 선물받기 교회 행 발길을 재촉하는 중이었습니다. 집근처 벽돌공장을 지나는데 당시 대림동에 있던 살레시오 수도원의 한 외국인 수사님이 저를 부르더니 당신이 잡수시던 빵을 주셨습니다. 그 빵 맛을 생각하면 지금도 제 입에 군침이 돌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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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지축으로 나날을 보내던 19662월초 어느 날 저의 손가락부터 시작된 이상한 마비의 징후들은 며칠 후 전신으로 확산되더니 급기야는 목의 절반에 음식물을 삼키는 근육까지 마비되는 위급한 상태에 이루게 되었습니다. 세브란스 등 여러 병원을 전전하고 마지막으로 잡은 지푸라기는 후암동 힐튼 호텔 뒤에 소재한 한일한의원이었습니다. 당시 한조해 원장님은 하루만 늦었어도 저는 이 세상을 뒤로했을 거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고 나중에 어머니가 말씀하시더군요. 초비상 상태의 투약 처방이 이어지며 며칠 지나니 목의 마비가 서서히 풀리며 병세가 호전 되었습니다. 7~8여 개월이 지나며 저는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입학 후 한 학기를 결석하고 2학기부터 학교생활을 시작했는데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학교생활은 지옥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저의 시련은 여기서 멈추지 않더군요. 초등학교 4학년 때와 중학교 1학년 때 앞서의 병이 재발했고 마지막 발병은 너무도 심각한 것이어서 어린 저자신도 차라리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구나 생각을 했지요. 그러나 기적같이 이번에도 엄청난 비용의 투약 과정을 통해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많은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중학교 1학년 104일부터 제 정규교육은 종을 쳤지요. 검정고시를 통해 중등교육 과정을 마친 아무런 희망도 없이 대입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세 번째 병마의 후유증은 신체적인 것 외에 제게는 더 큰 고통을 안겨준 사회공포증이라는 심리적 병증이었습니다. 아무튼 기약 없는 확률 제로에 가까운 대입 준비가 시작되었고 하루 17시간을 투입한다.’ ‘하루 연습장 한권을 다 쓴다.’(사실은 이런 계획이 실현됐던 날은 많지 않았지만요.) 각오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대학에 문턱을 넘었는데 아마 제가 문 닫고 마지막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1979년 대학교 일학년 봄 지금의 박지수 장로님을 만나 잠시 네비게이터 선교회 서클 활동을 하며 처음으로 기독교와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천형과 같은 사회불안증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 제영역이 아니라고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저는 철저히 사람들 앞에 서야하는 무대를 피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렇게 내 인생을 허비할 순 없다고 생각해서 동네에 있는 살레시오 수도원에서 불우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 교사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별생각 없이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1983년의 일입니다. 성당에서의 신앙생활 제 자신이 노력을 다하지 않은 탓이 주요인이겠지만 늘 마음 한구석에 공허함을 남겼습니다.

 

대학 졸업 후 여러 기업과 학교에 지원했지만 병역면제 사유가 늘 걸림돌이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불법적 행동을 했지요. 병역면제 사유를 체중미달로 둘러댔죠. 그랬더니 취직이 되더군요. 몇 곳의 외국인 회사와 고교 교사를 전전한 끝에 늘 다시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위해 외대 동시통역 대학원에 진학했고 그 후 같은 대학 후배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와의 결혼을 결심한 아내는 절대 헤어지지 않을 것을 전제한 것임을 밝히며 제가 앓았던 병을 규명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한 대학병원 정형외과를 찾아가 진단을 받았습니다. 결과는 청천벽력이었습니다. 루게릭병 즉 스티븐 호킹박사의 병과 동일하다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이 상황에서 제게 결혼은 불가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때의 심적 육체적 고통은 말로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아내는 아이 없어도 좋으니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틀쯤 후에 이 병의 영역이 신경내과 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진단을 받아보았습니다. 결과는 뜻밖에 루게릭이 아니었고 신경과 교수님은 먼저 진단내린 교수를 크게 힐난했습니다.

마침 아내도 저와 비슷한 시기에 영세를 받은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결혼 후에도 신앙은 늘 답보 상태였고 심지어는 성당은 거대한 친교 모임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작년 10월경에 박남석 집사님의 강력한 권유에 다운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오니 목사님부터 많은 신자들에 이르기까지 사람 냄새 물씬 풍기며 건실한 신앙심을 몸으로 보이시는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34년 신앙생활 동안 일요일 예배가 기다려지기는 다운교회가 처음입니다.

 

제 병마에 일그러진 상처투성이의 삶은 제게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운명을 주었습니다. 오랜 방황의 종지부가 이곳 다운교회라고 굳게 믿으렵니다. 주님의 가르침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 아니 만분의 일 이라도 행동으로 보여주는 삶을 실천하려 노력하겠습니다. 신앙 선배님의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3 Comments
박남석 2017.02.10 19:55  
많은 사람 앞에 서면 너무 힘들다고 하셔서 약간 걱정했는데 정말 잘하셨고 감동적으로 잘 들었습니다.
권기팔 2017.02.15 15:50  
어려운 시기를 견디어 주님 품에서 안정과 평안과 의미를 찾은 모습에 감동이 됩니다ᆞ특히 하루에 볼팬을 다쓰도록 노력했다는 얘기에 할말을 잊었습니다ᆞ귀하신분과 함께 신앙의 형제로 만나 감사합니다
cvbn 2023.04.1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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