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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자녀요? 축복의 자리입니다!'라고 고백해주는 아들

신경희 23 6335

가끔씩 지나간 생각을 하다 보면

좋은 추억거리가 생각나거나 반대의 추억거리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10년 전 쯤 안식년을 보내고 있을 때

저희 집 건너 편에 아주 모범적인 집사님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되시는 분은 호주에서 박사하신 분이셨고

부인되시는 분은 면세점에 근무하시면서 매 년말 고객 동원 일등 상을 꼭 꼭 받으셨던

그래서 그들 내외의 능력이 안팎으로 다 인정을 받으시는 분이셨습니다.

 

물론 교회에서도 교사로 , 목자로 열심을 다해 성실하게 섬기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안 사람되시는 집사님이 저희 집을 가끔 오실 때가 있으셨고

오셔서 대화를 하던 중에, 늘 빠지지 않고 하신 말씀중에

'아이고, 자기가 만났던 모 00 선교사는 안식년에 왔는데 집에 먹을 거리가 없어

맨날 얼굴이 누렇게 떠서 다니던데..

그리고 그 집 아이들 현관에 벗어 놓은 신발은 다 떨어졌고

걔네들 입고 있던 옷들은 누렇다 못해 빵구가 뻥뻥 나서...그래서 ...'

어쩌꼬 저쩌고~ 제가 듣기에는 약간 불편하고 헷갈리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처음 당분간은 그 분이 그런 말씀을 저에게 하시는 의중을

눈치를 못 채고 있다가 훨씬 나중에 되어서야

같은 교회에 출석하시는 다른 분들에게 전해 듣고 감을 잡았습니다.

'아~!!! 쏘데스까!!!'^^

아마 그 분은 저희는 당사자이니 대 놓고 직설적으로 못하셨지만

다른 분들에게는 당신 말의 해석까지 해주셔서 이해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분이 저를 만나면 지질히도 구질구질하고 청승스럽게 보이는

다른 선교사들 (혹은 목회자들 가정까지) 이야기를 하셨던 이유는

저희들도 그렇게 꼬질꼬질하게 보이고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는 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데

아마 그 분 눈에는 저희가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

당신이 가지고 있었던 그 분의 대단한 선교사관에 실망을 안겨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  분은 아마

'선교사는 죽도록 고생만 하여야 한다'

'어른들 뿐 아니라 선교사 자녀들도 얼굴도 새까맣고 사흘을 못 먹은 것 같이 바짝 말라 빠져야 한다'

'선교사는 절대로 세련되면 안 되고 고생한 티가 줄줄 흘러야 한다.

등의 고정 관념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멀쩡하게 아니 오히려 마치 강남에서 보았던 아이들 보다

더 세련되게 머리에 색깔 주고 힘주며

인터넷 쇼핑으로 싸게 산 옷으로 멋을 내고 다니는 우리 아들들을 보면

당신도 모르게 '저거 아닌데..쩟쩌 ...사이비 선교사 같으니라고 쩌쩌쩟' 하며

당신의 불편한 심기를 담은 입방아를 찍었던 것 같습니다.(요새 말로 저희를 뒷땅까셨죠^^)

 

심지어 저희를 파송한 저희 교회를 방문한 저희 아이들에게

'야, 너거들 후원받고 살면서 정.신.차리고 살아라~이~' 하셨답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저희들,

정말 철퇴를 한방 맞은 것 처럼 정신이 뻔쩍 났습니다.

ㅜㅜㅜ

 

 

선교사! 선교사의 자녀들!! 도 다를 바 없는 성정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 아닌가요?

 

편한 것 -저희들도 기왕이면 편한 환경에서 살고 싶습니다.

좋은 집, 좋은 옷, 맛있는 먹거리..누리고 싶지요.

 

짧은 인생,

이 몽뚱아리가 하자고 하는 데로

가능하면 만족시켜가며 살고 싶은 것은

한국에 남아 계신 분이나

선교지를 나선 사람이나 똑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며

현지화에 맞추어 사는 것이

저희 선교사들의 적응과 미덕이니

절제하고 검소한 삶의 스타일을 선택하며 살아 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저희들이 선택한 삶때문에

저희 아이들은, 선교사 자녀들은

최선의 삶을 추구하고

교과서적인 부모 , 정답만 고집하는 부모 아래서 누구보다 고생 많이 하는

희생 자들인 것 같습니다.

 

요즘 들어서 그런 생각이 문득 문득 이렇게 더 많이 나는 것은

오랜 만에 함께 몇 개월을 지난 큰 아이들이

다시 우리 곁을 떠나고 나니 여러 회한과 후회감이 생겨서인 것 같습니다.

 

'없는 인내심도 발휘해서 더 품어주고 더 잘해줄 걸..'

못 난 모습도 '요즘 얘들 다 저렇지 뭐' 하고 그냥 봐주고 넘어갈 일도

'선교지에서 자라 선교관에 살면서 왜 저렇지..? '

 

저도 위의 그 집사님과

다를 바 없는 왜곡된 편견으로 저희 자식들을 바라 보고

속상해 하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니까 너희들도 이렇게 살아야지'

'야, 선교사 아이들이 되어 선교지에서 자라 가지고 신앙 생활이 뭐 그 따위냐?'

'머리 스타일이 그게 뭐냐, 귀고리 한 것 하며 옷은 양아치도 아니고 ...아이고 ..'

'야, 쪽 팔린다. 쪽 팔려..어디 가서 우리 아버지 누구라고 ..할까 ..'

 

이렇게 몰아 대었던 무지한 부모 아래에서

우리 아이들은 '자기 입.맛.대로 해 보고 또

'남~이~사~' 하며 자기들 마.음.대로 살아 보고 싶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부모가 외출한 틈을 타

우리 아들 둘은 슈퍼에 가서 사 온 염색 약으로

우리로서는 백만금을 주어도 바꾸지 않을 오렌지 색으로 또 갈색으로

머리 색을 서로 바꾸어 놓고는

승리의 미소, 만족의 미소를 띄우며  외출다녀온 저희를 맞았던 적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한국에 나와 어릴 때 가깝게 지내던

친구 가족들이 나가려던 자기 아이들 붙잡아 약속 자리에 다 데리고 나왔는데

막상 우리 아이들은 약속 장소에 오기는 커녕

한국 오면 하고 싶었던 것으로 미장원에 가서 귀를 뚫어 귀고리를 하고 왔더군요.

그 것도 십자가 모양의 한 쪽 귀고리를..

'오 마이 가드' ...

 

그리고는 세월이 많이 흘러

큰 아이는 대학을 졸업했고 둘 째는 대학 4학년입니다.

 

너무나 부담스러운 부모의 눈과 반대를 피해

얼마큼 자기들 하고 싶은 데로 해 보고 사춘기도 보내고

지금의 20대 청년이 되었는지는

앞으로 대화로 풀어 나가야 할 저희 가정의 숙제인 것 같습니다.

 

참고로,

18살이 되어야 술을 살 수 있는 뉴질랜드에서

저희 큰 아이가 친구들과 모여 종강 파티를 하다가

대표로 술을 사러 갈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이디를 보자고 해서 보여 줬더니

'어 , 양~ 누구누구 이면 혹시 양승봉 선교사님 아들 아이가?' 하더랍니다^^

 

또 다른 어느 날은

만화를 빌리러 갔더니 가게 아저씨가

'어, 너 양 선교사님 아들 진모네' 하면서 만화 책 한 보따리를

공짜로 빌려 주더랍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부모님을 아무도 모르는 어느 곳에 가서 살고 싶다' 라는 말을 하더군요.

 

아마 자기 자신을 자기 이름 석자로  알아 주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아들, 아니 어느 선교사의 아들로,

MK 로 (Missionary kids)정체성의 꼬리표가 따라 다니는 것이

저희 아들에게는 숨이 막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아들이 아래와 같은 글을 써서

저희 선교부 인터서브 회지에 실었습니다.

 

한국에서 초딩 일년을 마치고

뉴질랜드와 네팔에서 학업을 거의 다 했으니(잠깐의 안식년은 한국 학교를 다녔으나)

한글 표현은 조금 딸림을 밝혀 둡니다.

 

 

신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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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선교사 자녀)이야기

MK, 축복의 자리임을 고백합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는 모르고 있었지만, 김해 아파트에서 친구들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떠나기 전날 방에서 이불 붙들고 울고 있었던 모습이 기억나네요. 근데 그 순간은 잠시였고 비행기 타본다는 것이 좋았는지 당당하게 제 가방을 매고 동생 손을 잡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선교사 자녀’, 딱 4가지가 생각나네요.

한국문화 적응문제, 경제적 어려움, 애정 결핍증, 교회의 시선

그리고 엑스트라로 배고픔…

배고픔

뉴질랜드에서의 2년과 고1까지 지냈던 네팔에서의 시간 동안, 전학을 10번 하였습니다. 한 곳에서 2년 넘게 사는 일이 없었고 새로운 친구들, 선생님들과 교육과정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공부를 정말 못했습니다. 노느라 바빠서 그런지 머리가 나빠서인지 이렇게 하면 중학교를 못 간다고 하더라고요. 일단 학교 마치고 보충 수업 받아가면서 실력을 조금이나마 키워 탄센과 차로 12시간 떨어져 있는 수도, 카트만두에 있는 선교사 자녀 기숙사 학교로 들어갔습니다. 탄센은 당시 중학교 과정이 없어서 부모님과 11살부터 떨어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기숙사 생활의 기억은 ‘정말 배고팠다’란 기억이 가장 먼저 납니다. 항상 배고프게 자고 배고프게 일어나고 배고프게 공부했던 기억이 나는 것을 보니 한이 맺혔었나 봅니다. 점심에 싸갈 수 있는 건 빵 두 조각. 집에 사는 아이들의 도시락이 부러울 뿐이고…… 저녁에는 식탁에 비해 인원이 많아 팔을 들고 먹지 못하는 식탁에 모여, 이게 일인분인지 반인분인지 파악이 안가는 365일 변하지 않는 파이를 먹으면서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한국문화

안식년을 맞아 가족은 부산으로 돌아왔습니다. 한국에서는 잘 나가시던 외과의사께서 다섯 가족이 살기에는 터무니없게 좁은 집에서 6개월간 지내며 저는 또한 한국 중학교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안녕하십니까?’를 ‘안녕하세요.’라고 해서 첫날부터 뺨을 연타로 3대 맞고… 지금 생각해봐도 어이없는 실수의 대가라고 하더라고요. 아이들에게는 맞고 오고, 영어 시험을 선배들이랑 같이 봤다고 또 맞고… 집에 오면 제 숙제 도와주신다고 같이 밤을 새셔야 하는 아버지. 제 인생의 고비 중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23 Comments
이혜순 2010.03.26 03:41  
*
사랑합니다.
*
이윤경 2010.03.25 20:39  
경희 선교사님, 사모님, 집사님, 자매님, 언니... 뭐라 부를까요?..... 언니 ㅋ
지난주에 문자로 시아버님이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었는데...
저도 시어머니께서 응급실에 들어가셔서 정신이 좀 없기도 했고, 뭐라 위로문자를 보내야 할지도 몰라서...
자식들의 가슴에 멋진 홈런타를 날려주시고 하나님곁으로 가신 아버님덕에
언니네 가정도 선교사로서 이리도 멋진 홈런타를 날리면서 사시는군요.
언니네 가정을 보면서 선교사의 삶이 얼마나 매력적인가를 다시 한번 보게되어 기뻐요.
선교사라는 테두리안에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끼를 마음껏 발휘하는 아이들도 넘 멋지고
그 끼를 고정관념이란 틀로 구속하지 않고 인정해주는 언니네 부부도 넘 멋지네요.
계속해서 멋진 홈런타를 날리는 가정이 되길... 우리 자주 교제해요.^-^
김동수 2010.03.26 00:03  
어딜가나 선입견과 자신들의 잣대로 판단하는 바리새인들이 있는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조심해야할 영역이기도 하고요.  ㅋㅋㅋ
아굴의 기도처럼 부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고 선교에 주력할수있을만큼 갖고 살면 되지 않을까요?
궁색하게 보이지 않고 세련되고 자기만의 개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선교사님 가정이 좋아보이기만 합니다.  엄마를 닮았는지 아들들이 연예인처럼 잘생기고 멋지게 생겼습니다.  그렇다고 양선교사님이 못났다는것은 아닙니다.  모두 굳!!  베스트!! 입니다.
김영미 2010.03.25 19:54  
사모님께서 이렇게 글을 올려주시니 넘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저 주일날 잠깐 인사만 했고 서로 교제도 없어서 약간의 안타까움이 있었는데, 그리고 최혜영목녀님처럼 나도 까마귀가 되고 싶다. 생각만 했거든요. 사모님 곧 찾아뵙겠습니다.^^ 
김병수 2010.03.25 08:11  
제가 한때나마 역지사지를 좌우명처럼 생각하고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느즈막이 까만 넥타이에 까만 넥타이 메고 하얀 봉투들고 오는 친구들의 모습속에서 과거의 저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어설프게 역지사지를 읊어댔던 저를 반성했었습니다.
선교사님과 아드님의 글을 통해 막연하게 느꼈던 선교사가정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더 헤아리게 되었습니다.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그리고 경의를 표합니다.
저는 국내파라서 저의 온 힘을 다해 제 손에 붙여주신 사람들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만 앞으로는 제 스스로를 더욱 경계하고 노력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축복합니다.
신경희 2010.03.25 17:51  
홍영수님께/ 제가 몇 번 501호를 몇 번 띵똥했는데 안계시더군요. 지금도 변기가 막혔는데 아무 때나 달려오실 수 있으시나요? ㅇ ㅎㅎㅎㅎ ; 사실 윤기네  처럼 컴퓨터에서 전축으로 음악이 나오도록 하는 그 기술 전수받고 싶어서 몇 번 띵똥했답니다. 다시 갈테니 하환영해주세요^^
신경희 2010.03.24 20:44  
아, 그리고 사진 배경은 2008년 네팔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4135 미터)에 도착해서 가족 사진 '모두 김치 ' 하고 찰카닥 !! 하고 찍었던 장소입니다.
홍영수 2010.03.25 03:33  
사진과 글 잘 봤습니다. 같은 건물에 살면서도 요즘은 자주 못 뵙네요.
변기 막히면 목사님만 부르지 마시고 501호도 한 번 띵똥~ 해 주시길. 달려가겠습니다. ^^;
신경희 2010.03.24 19:59  
제가 팔을 끼고 있는 아이가 저희 양페밀리의 장남 진모입니다. 진 어학원에서 가르치다가 지금은 다시 자기 길을 찾아 뉴질랜드로 갔습니다. 둘 째 겨자색 머리는 한동대 경제경영학과 4학년 경모입니다. 막내 인모는 네팔산으로 현재 초딩6학년입니다.
김영손 2010.03.30 02:26  
p.s. 공짜폰은 폐기하고 유로로 바꾸었습니다.
김영손 2010.03.30 01:49  
댓글 쓰기가 망설여 집니다. 글쓰는 재주가 전혀 없어 몇 의 글을 쓰려고 하면 머리에서 쥐가 나는 기분입니다. 어쨌든 한국에서 편하게 살고 먹고 한 저희들의 모습이 매우 부끄럽게 느껴 집니다. 선교사님 자녀라서 덤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듯 싶습니다. 한국인은 세계에서 유독 유별난 민족이라고 합니다. 한국에만 "차이나타운"이 없다고 하는데 정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의지적으로 선택하신 선한일에 감사하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 봅니다. 위의 두글을 쓰려면 저의 경우 3개월은 걸려야 할듯 싶습니다. 좋은 사진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신경희 2010.03.30 00:45  
김영미 까마귀님 어여 날라오셔여~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디 계셔요?^
홍영수 집사님도 '띵똥'해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양석민 2010.03.26 20:44  
진모의 글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많은 아픔과 시련속에서 반석처럼 견고해진 진모의 모습을 봅니다. 진심으로 선교사님 가정을 축복합니다^^
유우주 2010.03.26 21:29  
저도 진모가 건강해 보이지 못해서 그리고 막상 부모님 밑에 오니, 나이보다 더 어린양이 많은것 같아서 한창 부모님의 돌봄과
사랑을 받아야할 나이에 스스로 독립하여 과중한 부담과 책임감 가운데 생활하며, 잘먹지 못하여 그런것 같아 마음이
아프고, 또한 저의 자녀들도 그런 생활을 해야 하려나 하는 것 땜에 심경이 착찹했었는데, 진모의 글을 읽고 보니,
궁국적으로 진모의 말이 맞다고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진행형이고, 저도 38년을 살았지만, 인생이 대학을 들어가면서
결정되거나, 학교졸업후 좋은 첫직장을 구하면서 성공이나 실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꼇고,굽이
굽이 12굽이가 넘는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죽을때까지 교만해서도 않되고, 또한 좌절하거나
현재의 모습에 실망해서도 않된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이끌어주신 삶이었고, 순리적으로 부모가 결정을 했으면
자녀들은 그에 따라 주어진 삶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있는 삶이기 때문에 반드시 축복받은 삶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의 부부와 두자녀에게도 그러리라 믿습니다. 사모님,선교사님, 진모,성모,인모 홧팅~
권영환 2010.03.26 22:13  
갑자기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네요.
사람들이 무어라 하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수고와 눈물과 기도를 아시고
눈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포근히 안아주실 것입니다.
김동환 2010.03.27 01:02  
저는 전에는 몰랐지만 선교사님 부부께서 선교 간증을 해주실때 바로 이것이 교회의 역활이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 자신이  부끄러웠고 죄송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위대한 선지자들이 자식농사를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예전에 꽤 충격이었습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사역이 모든 진액까지 드리는 삶임을 알고서 겨우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욥이 욥의 친구들로 부터 많은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끝내는 당당히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모습처럼 승리하시는 선교사님 인생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최혜영 2010.03.27 10:08  
진모의 글을 읽고 두분의 눈과 가슴에 흘렀을 눈물을 떠올립니다.
부모님도 잘몰랐던 진모의 어려움을 하나님은 분명 다알고 그분의 크신뜻 가운데 허락하셨읍니다.
하나님께서 두분과 자녀들을 사랑하시므로 말씀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선교사님 가족이 저희곁에 계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홍영수 2010.03.27 12:15  
헉~ 그랬군요. 컴퓨터와 연결... 함 봐드릴께요.
김성호 2010.03.27 17:53  
교회에서 지나며 간혹 얼굴만 뵈었네요. 진솔한 선교사님의 글과 진모군의 글을 보면서
저또한 선교사님들에 대해 무슨 선입견은 없는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선교사 자녀들의 삶속에 아름답게 끝까지 개입하실 것을 믿습니다. 큰 결단과 선택으로 순종을 택하신 선교사님 가정에 주님주시는 행복과 축복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신경희 2010.03.30 18:50  
김영손 형제님께/ ㅇ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저희도 단박에 완성하지는 않았겠죠?^
2010.03.31 08:54  
MK는 진정 하나님의 축복을 듬뿍 받은 자들입니다 %5
박승훈 2010.03.31 08:54  
MK는 진정 하나님의 축복을 듬뿍 받은 자들입니다 ^^  그리고 장차 부모님의 사명을 이어 받아 선교사적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하는 자들이기도 한것 같습니다.  둘째 진모가 한동대 경영경제학과 4학년이군요.  한동이 그립습니다...
신경희 2010.03.31 17:41  
승훈형제님/ 한동의선배이신가봐요? 우리 경모오면 아는 척 좀 해주시고 맛있는 것도 사주시고 한 수 부탁합니다~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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