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자녀요? 축복의 자리입니다!'라고 고백해주는 아들
가끔씩 지나간 생각을 하다 보면
좋은 추억거리가 생각나거나 반대의 추억거리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10년 전 쯤 안식년을 보내고 있을 때
저희 집 건너 편에 아주 모범적인 집사님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되시는 분은 호주에서 박사하신 분이셨고
부인되시는 분은 면세점에 근무하시면서 매 년말 고객 동원 일등 상을 꼭 꼭 받으셨던
그래서 그들 내외의 능력이 안팎으로 다 인정을 받으시는 분이셨습니다.
물론 교회에서도 교사로 , 목자로 열심을 다해 성실하게 섬기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안 사람되시는 집사님이 저희 집을 가끔 오실 때가 있으셨고
오셔서 대화를 하던 중에, 늘 빠지지 않고 하신 말씀중에
'아이고, 자기가 만났던 모 00 선교사는 안식년에 왔는데 집에 먹을 거리가 없어
맨날 얼굴이 누렇게 떠서 다니던데..
그리고 그 집 아이들 현관에 벗어 놓은 신발은 다 떨어졌고
걔네들 입고 있던 옷들은 누렇다 못해 빵구가 뻥뻥 나서...그래서 ...'
어쩌꼬 저쩌고~ 제가 듣기에는 약간 불편하고 헷갈리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처음 당분간은 그 분이 그런 말씀을 저에게 하시는 의중을
눈치를 못 채고 있다가 훨씬 나중에 되어서야
같은 교회에 출석하시는 다른 분들에게 전해 듣고 감을 잡았습니다.
'아~!!! 쏘데스까!!!'^^
아마 그 분은 저희는 당사자이니 대 놓고 직설적으로 못하셨지만
다른 분들에게는 당신 말의 해석까지 해주셔서 이해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분이 저를 만나면 지질히도 구질구질하고 청승스럽게 보이는
다른 선교사들 (혹은 목회자들 가정까지) 이야기를 하셨던 이유는
저희들도 그렇게 꼬질꼬질하게 보이고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는 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데
아마 그 분 눈에는 저희가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
당신이 가지고 있었던 그 분의 대단한 선교사관에 실망을 안겨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 분은 아마
'선교사는 죽도록 고생만 하여야 한다'
'어른들 뿐 아니라 선교사 자녀들도 얼굴도 새까맣고 사흘을 못 먹은 것 같이 바짝 말라 빠져야 한다'
'선교사는 절대로 세련되면 안 되고 고생한 티가 줄줄 흘러야 한다.
등의 고정 관념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멀쩡하게 아니 오히려 마치 강남에서 보았던 아이들 보다
더 세련되게 머리에 색깔 주고 힘주며
인터넷 쇼핑으로 싸게 산 옷으로 멋을 내고 다니는 우리 아들들을 보면
당신도 모르게 '저거 아닌데..쩟쩌 ...사이비 선교사 같으니라고 쩌쩌쩟' 하며
당신의 불편한 심기를 담은 입방아를 찍었던 것 같습니다.(요새 말로 저희를 뒷땅까셨죠^^)
심지어 저희를 파송한 저희 교회를 방문한 저희 아이들에게
'야, 너거들 후원받고 살면서 정.신.차리고 살아라~이~' 하셨답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저희들,
정말 철퇴를 한방 맞은 것 처럼 정신이 뻔쩍 났습니다.
ㅜㅜㅜ
선교사! 선교사의 자녀들!! 도 다를 바 없는 성정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 아닌가요?
편한 것 -저희들도 기왕이면 편한 환경에서 살고 싶습니다.
좋은 집, 좋은 옷, 맛있는 먹거리..누리고 싶지요.
짧은 인생,
이 몽뚱아리가 하자고 하는 데로
가능하면 만족시켜가며 살고 싶은 것은
한국에 남아 계신 분이나
선교지를 나선 사람이나 똑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며
현지화에 맞추어 사는 것이
저희 선교사들의 적응과 미덕이니
절제하고 검소한 삶의 스타일을 선택하며 살아 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저희들이 선택한 삶때문에
저희 아이들은, 선교사 자녀들은
최선의 삶을 추구하고
교과서적인 부모 , 정답만 고집하는 부모 아래서 누구보다 고생 많이 하는
희생 자들인 것 같습니다.
요즘 들어서 그런 생각이 문득 문득 이렇게 더 많이 나는 것은
오랜 만에 함께 몇 개월을 지난 큰 아이들이
다시 우리 곁을 떠나고 나니 여러 회한과 후회감이 생겨서인 것 같습니다.
'없는 인내심도 발휘해서 더 품어주고 더 잘해줄 걸..'
못 난 모습도 '요즘 얘들 다 저렇지 뭐' 하고 그냥 봐주고 넘어갈 일도
'선교지에서 자라 선교관에 살면서 왜 저렇지..? '
저도 위의 그 집사님과
다를 바 없는 왜곡된 편견으로 저희 자식들을 바라 보고
속상해 하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니까 너희들도 이렇게 살아야지'
'야, 선교사 아이들이 되어 선교지에서 자라 가지고 신앙 생활이 뭐 그 따위냐?'
'머리 스타일이 그게 뭐냐, 귀고리 한 것 하며 옷은 양아치도 아니고 ...아이고 ..'
'야, 쪽 팔린다. 쪽 팔려..어디 가서 우리 아버지 누구라고 ..할까 ..'
이렇게 몰아 대었던 무지한 부모 아래에서
우리 아이들은 '자기 입.맛.대로 해 보고 또
'남~이~사~' 하며 자기들 마.음.대로 살아 보고 싶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부모가 외출한 틈을 타
우리 아들 둘은 슈퍼에 가서 사 온 염색 약으로
우리로서는 백만금을 주어도 바꾸지 않을 오렌지 색으로 또 갈색으로
머리 색을 서로 바꾸어 놓고는
승리의 미소, 만족의 미소를 띄우며 외출다녀온 저희를 맞았던 적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한국에 나와 어릴 때 가깝게 지내던
친구 가족들이 나가려던 자기 아이들 붙잡아 약속 자리에 다 데리고 나왔는데
막상 우리 아이들은 약속 장소에 오기는 커녕
한국 오면 하고 싶었던 것으로 미장원에 가서 귀를 뚫어 귀고리를 하고 왔더군요.
그 것도 십자가 모양의 한 쪽 귀고리를..
'오 마이 가드' ...
그리고는 세월이 많이 흘러
큰 아이는 대학을 졸업했고 둘 째는 대학 4학년입니다.
너무나 부담스러운 부모의 눈과 반대를 피해
얼마큼 자기들 하고 싶은 데로 해 보고 사춘기도 보내고
지금의 20대 청년이 되었는지는
앞으로 대화로 풀어 나가야 할 저희 가정의 숙제인 것 같습니다.
참고로,
18살이 되어야 술을 살 수 있는 뉴질랜드에서
저희 큰 아이가 친구들과 모여 종강 파티를 하다가
대표로 술을 사러 갈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이디를 보자고 해서 보여 줬더니
'어 , 양~ 누구누구 이면 혹시 양승봉 선교사님 아들 아이가?' 하더랍니다^^
또 다른 어느 날은
만화를 빌리러 갔더니 가게 아저씨가
'어, 너 양 선교사님 아들 진모네' 하면서 만화 책 한 보따리를
공짜로 빌려 주더랍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부모님을 아무도 모르는 어느 곳에 가서 살고 싶다' 라는 말을 하더군요.
아마 자기 자신을 자기 이름 석자로 알아 주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아들, 아니 어느 선교사의 아들로,
MK 로 (Missionary kids)정체성의 꼬리표가 따라 다니는 것이
저희 아들에게는 숨이 막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아들이 아래와 같은 글을 써서
저희 선교부 인터서브 회지에 실었습니다.
한국에서 초딩 일년을 마치고
뉴질랜드와 네팔에서 학업을 거의 다 했으니(잠깐의 안식년은 한국 학교를 다녔으나)
한글 표현은 조금 딸림을 밝혀 둡니다.
신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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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선교사 자녀)이야기
MK, 축복의 자리임을 고백합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는 모르고 있었지만, 김해 아파트에서 친구들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떠나기 전날 방에서 이불 붙들고 울고 있었던 모습이 기억나네요. 근데 그 순간은 잠시였고 비행기 타본다는 것이 좋았는지 당당하게 제 가방을 매고 동생 손을 잡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선교사 자녀’, 딱 4가지가 생각나네요.
한국문화 적응문제, 경제적 어려움, 애정 결핍증, 교회의 시선
그리고 엑스트라로 배고픔…
배고픔
뉴질랜드에서의 2년과 고1까지 지냈던 네팔에서의 시간 동안, 전학을 10번 하였습니다. 한 곳에서 2년 넘게 사는 일이 없었고 새로운 친구들, 선생님들과 교육과정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공부를 정말 못했습니다. 노느라 바빠서 그런지 머리가 나빠서인지 이렇게 하면 중학교를 못 간다고 하더라고요. 일단 학교 마치고 보충 수업 받아가면서 실력을 조금이나마 키워 탄센과 차로 12시간 떨어져 있는 수도, 카트만두에 있는 선교사 자녀 기숙사 학교로 들어갔습니다. 탄센은 당시 중학교 과정이 없어서 부모님과 11살부터 떨어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기숙사 생활의 기억은 ‘정말 배고팠다’란 기억이 가장 먼저 납니다. 항상 배고프게 자고 배고프게 일어나고 배고프게 공부했던 기억이 나는 것을 보니 한이 맺혔었나 봅니다. 점심에 싸갈 수 있는 건 빵 두 조각. 집에 사는 아이들의 도시락이 부러울 뿐이고…… 저녁에는 식탁에 비해 인원이 많아 팔을 들고 먹지 못하는 식탁에 모여, 이게 일인분인지 반인분인지 파악이 안가는 365일 변하지 않는 파이를 먹으면서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한국문화
안식년을 맞아 가족은 부산으로 돌아왔습니다. 한국에서는 잘 나가시던 외과의사께서 다섯 가족이 살기에는 터무니없게 좁은 집에서 6개월간 지내며 저는 또한 한국 중학교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안녕하십니까?’를 ‘안녕하세요.’라고 해서 첫날부터 뺨을 연타로 3대 맞고… 지금 생각해봐도 어이없는 실수의 대가라고 하더라고요. 아이들에게는 맞고 오고, 영어 시험을 선배들이랑 같이 봤다고 또 맞고… 집에 오면 제 숙제 도와주신다고 같이 밤을 새셔야 하는 아버지. 제 인생의 고비 중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